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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교수님과 부조리극
기사입력 2019-06-07 04:00:09. 폰트 폰트확대폰트축소
김태형 산업2부 차장
   



요새 신축 오피스텔이나 백화점, 대형 마트 건물은 지하 4∼6층이 기본이다. 여유로운 주차공간을 확보하고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기 위해서다. 덕분에 지하수와 토사 유입을 막아주는 지하 흙막이공사가 더 중요해졌다. 도심지 대형 건축물의 흙막이 공사에 가장 많이 쓰는 공법은 ‘지하연속벽(Slurry Wall)’이다. 슬러리월은 땅속에 여러 개의 콘크리트 벽체를 연속으로 설치해 이어 붙이는 공법을 말한다. 파일(Pile)을 박는 전통 방식보다 공사비는 비싸지만 흙막이벽을 본체벽으로 쓸 수 있어 공사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많이 쓴다.

그런데 최근 이 공법이 퇴출 위기에 몰렸다. 일본보다 센 지하 구조물 내진 규제 때문이다. 국토교통부가 지난 3월 제정ㆍ고시한 ‘건축물 내진설계기준(KDS 41 17)’이 발단이다. 새 기준에 ‘지하 구조물의 내진설계 기준’을 신설했는데, 이 기준대로라면 슬러리월 공법을 쓰면 안 된다. 수직 벽체를 연결한 슬러리월은 벽체 간 이음새가 약해 수평으로 흔들리는 지진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반면, 다수의 건축구조기술사들은 흙벽이 둘러싸고 있는 지하 구조물에 지상 구조물과 동일한 잣대로 내진설계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한다. 과잉 설계이자, 비현실적 설계라는 것이다. 국토부 역시 당장 슬러리월 공법을 공사현장에서 퇴출시키지 못하고 있다. 대안이 없으니 정부와 업계가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국토부는 2013년 말 기술경쟁력을 높이겠다며 ‘건설공사기준 코드체계’ 개편방침을 정하고, 건설공사기준을 767개 코드 단위로 표준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기존 설계기준 21종과 표준시방서 21종을 설계기준 코드체계(KDSㆍKorean Design Standard)와 시공기준 코드체계(KCSㆍKorean Construction Specifications)로 재편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건축구조기준은 ‘KBC(Korea Building Code)’에서 ‘KDS’로 또 한번 이름이 바뀌었다. ‘빌딩 코드’를 ‘디자인 기준’으로 바꾼 실익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국토부는 코드 표준화를 계속 밀어붙이고 있다. 지하 건축물 내진설계 기준도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미리 막을 순 없었을까. 각종 건설기준은 관련 협단체와 학회가 초안을 만들고, 국가건설기준센터 건설기준위원회와 중앙건설기술심의위원회가 심의한다. 초안은 대부분 해당 분야의 ‘권위 있는 교수님’들 몫이다. 미국 등에선 기술기준을 만들 때 실무자와 교수(학계)의 비율이 7대3 정도지만, 한국에선 실무자 비중이 10%에 그친다. 그나마 참여 실무자들도 언제 어디서 피심의 대상으로 만날지 모르는 교수 앞에서 감히 반대의견을 낼 수 없다. 촘촘해보이는 이중 삼중 자문ㆍ심의 시스템은 ‘거수기’일 뿐이다. ‘엉터리 기준’이 나와도 대놓고 맞설 ‘간 큰’ 기업도, 실무자도 없다. 한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다.

국토부에 따르면 건설공사기준은 ‘공사 관계자가 설계나 공사 시 지켜야 하는 기준’이다. 또한 ‘시설물의 안전ㆍ품질ㆍ공사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국가의 중요한 지적재산’이다. 하지만 그 중요도에 비해 생산과정은 무책임하고, 파급력은 크다.

김태형기자 k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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