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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감자꽃 필 무렵
기사입력 2019-06-18 07:00:12. 폰트 폰트확대폰트축소
   

  노란 꽃들이 지고 하얀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여름이 온다는 신호다. 개나리 산수유가 지고 샛노란 민들레가 하얀 머리를 풀어 가벼워진 홀씨를 늦은 봄바람에 날려보내면, 그 하얀 기운을 안아 들인 듯 산 언저리에 조팝나무, 이팝나무, 찔레나무가 서둘러 하이얀 꽃망울을 터트린다. 곧이어 도랑 건너 널펀한 밭에는 무성한 잎새 사이로 감자꽃이 수줍게 피어난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이는 왜 장미를 건너 뛰느냐며 항의할지 모르나, 왠지 장미는 그 강렬한 화려함이 낯설다. 어느 왕가의 규수가 순례자처럼 잠시 들른 듯, 혼자서도 잘나 보이니 슬몃 외면해도 무방할 것 같다.

  하얀 꽃이 피면 여름이 가까이 왔다는 신호다. 연록색 이파리가 짙은 푸르름으로 변성하고, 과수마다 농작물마다 열매와 뿌리가 튼실튼실 근육을 키워가는 성장의 계절로 뛰어들라는 손짓처럼, 여기저기  하이얀 꽃들이 피기 시작하면 봄날은 다 갔다. 그리고 감자꽃이 핀다. 흡사 부끄러운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 밭고랑을 사이에 두고 고개를 갸웃이 감자꽃이 피면, 하늘은 더욱 파아랗게 빛났다. 그 아래 눈이 부시게 하이얀 감자꽃, 바람은 촉촉이 젖어 있고 간간이 날아드는 노랑나비의 날갯짓이 하얀 꽃잎 위에서 이른 더위를 쫓아낸다.

  한 달 남짓이면 토실토실 감자가 허전했던 바구니에 가득 담기리라. 그때를 위해 저토록 정결한 꽃을 피워 처연한 기대를 갖게 하는가. 어린 시절 감자는 중요한 산물이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는 데 감자만큼 속 편한 의지처는 없었다. 감자는 설움이면서 행복이었다. 감자꽃의 약속이었다. 소복 입은 여인의 하얀 저고리를 닮은 감자꽃은, 청상(靑孀)의 가슴 한 편에 숨겨둔 여린 불씨 같은, 척박한 땅에서 움트는 정직한 소망처럼 눈물겨웠다.

  그 시절에는 아직 불행에서부터 행복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고, 절망에서부터 희망까지의 시간도 길지 않았다. 고단함 속에서 여유를 찾았고 아픔 가운데서도 곧 새 살이 돋아나리라는 기대를 잃지 않았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마친 고단한 서민들이 호롱불 아래에서 커피와 함께 삶은 감자를 먹고 있는 정경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거친 테이블 위 감자 바구니와 둘러앉은 사람들의 표정이 달빛 아래 감자꽃마냥 슬프다. 그들의 지친 표정이 감자의 생김처럼 투박하다. 그러나 옆 사람에게 감자를 건네는 눈빛과 손길에는 따뜻함이 묻어난다. 사람의 생김생김은 다르지만 그 서정은 우리와 흡사하다.

 김동인은 일제 강점기 시절 '감자'를 써서 가난의 설움을 녹여냈다. 소설에는 복실이란 처녀가 돈에 팔려 혼인을 하고, 감자를 훔치다가 몸도 마음도 상처 입고, 끝내는 억울하게 당한 죽임마저 물건처럼 거래되는 참담한 이야기가 그려진다. 기억도 아련한 송충이 잡이 행사가 등장하고, 감자 두 알로 끼니를 때우던 동무들의 마른버짐 핀 얼굴이 어른거려지는 이야기. 약자의 비애와 타락의 서사가 감정없이 묘사되는 문장이 통증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한 시대의 자화상 같은 소설이다. 그 시절 감자는 설움일 뿐, 아직 희망이 깃들지 못했다.

  그런 슬픈 전설을 지닌 감자꽃의 오련한 미소는 그래서인지 늘 엷은 우수가 배여 있다. 그러나 우수가 눈물로 변하기 전에 순정한 꽃잎은 꿈을 꾼다. 따뜻한 마음과 정직한 심성의 아름다운 꿈이다. 자신의 화사함을 애써 감추고 잎과 줄기를 배려하며 혼자 튀지 않으려 애쓰는 고운 마음이다. 그 마음이 눈치보며 자란 둘째 딸을 꼭 닮았다. 언니에게 치이고 동생에게 양보하느라 핼쑥해진 얼굴처럼 가여우면서도 기특함이 오롯하다. 비온 뒤 물방울을 이고 섰는 감자꽃이 특히 그렇다.

  그러고도 알찬 결실을 위해 아픈 요절을 감수한다. 청결한 하얀 미소가 주목을 끌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서둘러 꽃송이를 솎아서 떼어내 버린다. 꽃을 제 때에 따 주어야 감자알이 굵게 맺히기 때문이다. 화려함을 오래 뽐내고 있다가는 땅 속 감자를 튼실하게 하려는 꿈을 이루지 못한다. 주위가 우르러 볼 때 스스로 화관을 내려놓는 자만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긴다는 것을 감자꽃은 안다. 감자꽃이 내뿜는 상명(爽明)한 기품은 그의 운명에 감사하는 예감에서 나온 것인가.

  이제 감자꽃은 어리숙한 어미처럼 행복하고 아이처럼 정직하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마나 자주 감자 /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마나 하얀 감자 ” 권태응 시인은 이에 꼭 맞는 시를 지었다.

  이즈음 감자꽃이 필 무렵이면, 어려워도 행복했고 정직하게 살았던 기억이 아득하다. 감자꽃이 피면 여름이 시작되고, 배 부르게 감자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권재욱 건원건축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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