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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평양냉면과 방하착
기사입력 2019-09-18 07:00:12. 폰트 폰트확대폰트축소

 

   

  소설가 김훈은 그의 수필집 ‘연필로 쓰기’에서 수수하고 슴슴한 평양냉면의 이야기를 분단의 역사에 빗대어 전하고 있다. 평양냉면 한 그릇에서 개마고원의 저녁놀과 백두산의 새벽과 압록강 하구의 밀물과 썰물, 평양의 박치기꾼과 강계의 미녀들, 마지막 철수선이 떠났던 흥남 부두의 눈보라와 아우성을 떠올렸던 것이다. 부산의 피난민들이 전파했다는 평양냉면은 이제 별미의 기호식이 되었다. 며칠 전에도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여가수가 공연을 마치고 평양에서 먹은 냉면 맛이 우리네 입맛과는 달랐지만 세 그릇이나 비울 만큼 맛있다고 했다. 평양냉면은 보기엔 단순하지만 놀랍도록 많은 이야기가 넘친다. 냉면을 시켜놓고 뜨거운 육수를 마시며 오가는 이야기를 들어보라. 전분의 함량은 어떻고 육수의 차이는 무엇이고 제육은 어디가 으뜸이라는 분석적 비평에 더해 그 집 주인의 족보나 내력에다 분점의 소재지까지 오르내린다. 저마다 그 방면의 대가임을 자처하는 것이다. 순댓국이나 짜장면을 드시는 분들에게선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뭘 저렇게까지 하나 싶다가도 시끌벅적 머리 아픈 세상에 그런 한담으로 더운 한여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도 세상살이의 한 방편이겠다.

  그러나 고수는 같은 장면에서 다른 관점을 만들어 내는 것, 그 분야의 탁월한 미식가인 강선배의 이야기는 사뭇 달랐다. 어느 날 평양냉면을 먹으러 가자고 선심 쓰듯 직원들을 몰고 갔는데 어느 여직원이 만두만 몇 개 집어 먹더라는 것이다. 다음 번에도 그러길래 물어 보니 평양냉면은 걸레 삶아 놓은 음식 같아 못 먹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고 했다. 평양냉면은 회식 음식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그 후 그 선배는 부하 직원들과 식사할 때 꼭 그들이 먼저 메뉴를 고르게 했다. 남의 입장이 된다는 것이 말은 쉽지만 몸으로 옮기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 아닐는지.

  며칠 전 사표를 낸 후배가 찾아왔다. 예전에 나와 함께 일했던 친구였다. 여린 심성에다 좌절을 모르던 친구라서 걱정이 되었다. 영업 부진의 이유를 자신에게만 돌리는 회사가 야속해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임원인 처지에 실적 부진으로 물러나는 데다 나이 때문에 다른 곳에 취직이 될지 두렵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두 개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하나는 방하착(放下着)의 고사다. 맹인이 길을 가다 절벽에 발을 헛디뎠다. 죽을 힘을 다해 매달렸다.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사실 몇 미터가 안 되는 높이였다. 손을 놓으면 편해질 일이었다. 또 하나는 천년을 사는 거북이 이야기다. 거북이알은 열 개중 아홉 개가 독수리나 뱀에게 먹힌다. 그렇게 살아남은 한 마리 새끼 거북이가 홍수를 만나 떠밀려 내려갔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의 순간에 솔나무가 떠내려 왔다. 거북이는 솔가지를 잡고 무사히 살 수 있었다. 천년을 사는 거북이도 그런 인연을 만나야 천년을 살 수 있다. 마음을 편히 먹고 새로운 인연을 기다려 보자고 말한 셈이다. 그는 폼 잡고 한 내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는 듯했다. 당연히 그러하리라.

  내게도 같은 시절이 있었다. 소주 한 잔으로 위로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곤경에 처한 내 처지는 그들에게 아직도 자신들이 건재하다는 자기 안심을 위한 안줏거리였다. 후배지만 그는 짐스럽지 않은 나의 친구였다. 물에 빠진 사람에겐 수영 강습이 아니라 로프를 던져야 한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모색했다.

  다음날 몇 군데를 수소문했다. 큰 광고회사에 다니는 후배가 시간과 마음을 내주었다. 한두 군데 헤드헌터에게도 연락했다. 지금도 여전히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진행 중이다. 그 결과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안다. 그는 위로가 아니라 힘을 얻었고 앞으로 내 어려움에 쌍수를 들고 덤벼들어 줄 것이다. 실직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선문답 따위는 필요 없다. 거리로 나가 그 대신 비를 맞아 주어야 한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를 위로했고 인연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견고한 인간적 신뢰는 마음이 아니라 몸이 만든다. 당신 앞 그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해라. 그의 문제가 당신의 문제라고 생각해라.

  그러니 리더십 문제로 고민하시는 기업의 높은 분들께 전한다. 툭하면 지난 시절의 경험을 늘어 놓는 일 좀 그만해라. 좋은 말도 윗사람이 하면 잔소리가 되는 법이고 세상이 바뀌어 그게 적용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인터넷에 떠도는 성공 등식을 카톡으로 날라준다고 그들이 고마워할 줄 안다면 큰 오산이다. 가정 방문을 통해 학생의 사정을 세세히 살펴보고 쌀 봉지라도 놓고 오신 선생님을 기억해라. 말이 아니라 직접 나서서 그들의 문제를 듣고 구체적으로 해결하라. 걸레 삶아 빤 듯한 평양냉면이 고역인 직원을 위해 메뉴가 고르게 적힌 다트판이라도 사오라는 말이다. LG전자가 직원들이 주도적으로 일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전사적으로 ‘리더 없는 날’을 만들어 운영한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러겠느냔 말이다.

 

김시래(동국대 광고홍보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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