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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흔적과 편린, 그리고 트리거
기사입력 2019-10-28 07:00:09. 폰트 폰트확대폰트축소
   

  지난해 제작된 우리나라 독립영화 ‘벌새’는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소시민의 일상과 함께 한 소녀의 감정선을 따라 당시의 시대상을 재현하고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삶에 큰 변화를 초래하는 모티브가 바로 성수대교 붕괴 사고이다. 몇 년 전 전국적인 화제가 됐던 TV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삼풍백화점 사고가 다루어졌던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우리의 기억의 편린을 하나하나 떠올리게 한다.

  간은 상처를 입어도 어느 정도 자가 치유가 가능하듯이 우리 사회도 강인한 듯, 무던한 듯 살아지고 있다. 하지만 간에 남은 흔적처럼 우리 기억에서도 그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무생물인 기반시설들도 인간과 유기적ㆍ입체적으로 어우러져 살아간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기유사성을 갖는 ‘프랙탈 이론’이 적용된다고 보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리라.

  지난 10월1일에는 타이완에서, 지난해 8월에는 이탈리아에서 교량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국내에서는 지난 9월 서울 중구에서 수도관 파열로 인한 침수사태가 발생했으며, 그보다 앞서 인천에서는 이른바 ‘붉은 수돗물’로 인해 시민들의 불편이 컸다. 지난해 11월에는 서울 도심에서 통신구 화재 사고가 있었고 12월에는 경기도 고양에서 열수송관 파열 사고가 발생했다.

  이들 사고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 화두가 바로 기반시설의 ‘노후화’와 ‘유지관리 소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반시설은 점차 대형화되고 복잡해지는 양상이다. 따라서 자연재해로 인한 것이 아니더라도 ‘라이프라인’인 기반시설과 관련한 복합재난 대응 및 통합관리체계 마련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다행히 우리 정부에서는 시설별로 분절적으로 관리되던 기존의 기반시설 관리체계를 일원화하고 노후 기반시설에 대한 관리 수준 향상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난 해 12월 ‘지속가능한 기반시설 관리 기본법’이 제정ㆍ공포되었으며, 내년 1월 시행을 앞두고 제도 이행을 위한 업무 절차 정비작업이 한창이다.

  법 시행에 앞서 지난 6월에는 ‘지속가능한 기반시설 안전강화 종합대책’을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바 있다. 이 종합대책에는 기반시설에 대한 선제적 투자ㆍ관리를 통해 사용 수명을 연장하고 안전을 확보하는 한편, 관리 시스템 확립으로 과학적 관리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담겨 있다.

  기반시설관리법이 시행되면 관리감독기관은 5년 주기의 관리계획을 수립ㆍ이행하여야 하고, 기반시설의 현상 점검과 장래 예측을 통해 적절한 유지관리와 성능 개선을 실현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보다 앞서 기반시설의 노후화에 직면한 일본과 미국도 중장기적 관점에서 기반시설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안 마련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 결과 도출된 일본의 ‘인프라 장수명화 기본계획’과 미국의 ‘MAP-21(Moving Ahead for Progress in the 21st Century Act)’ 및 ‘FAST(Fixing America’s Surface Transportation Act)’ 에 따른 관리계획 등은 우리나라의 기반시설관리법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국외의 사례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면, ‘Lessons from~’으로 시작하는 다수의 문헌을 찾아볼 수 있다. 사회·경제 영역부터 시스템, 기반시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실패 사례와 통계 자료를 공개·공유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여 교육자료로 활용하는 사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렇게 공유된 정보는 한 단계 더 진보한 전략을 수립하는 근거가 된다. 우리 정부도 개별적으로 관리되던 관리체계 정보를 연계,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 중이다. 기반시설별 제원, 노후도, 점검·보수보강 이력 등을 살피고 기준에 부합하게 유지관리되고 있는지에 대한 실태조사도 계획하고 있다. 조사 결과가 시스템에 축적되면 취약지역이나 시설 요소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활용할 수 있는 DB 기반의 공유체계가 갖추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제는 기반시설을 ‘안전하게’를 넘어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거기에 더해 전 생애주기를, 비용-효율을, 그리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융·복합 첨단기술을 고려해 관리해야 한다고. 그러나 정작 정부가 정책을 추진하고 이행하려고 하면 ‘그 많던 전문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많은 현학적 이론들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서’, ‘실험 조건과 현장 조건이 달라서’와 같은 이유들로 한 발 물러나는 이들도 많다.

  또 제도를 이행해야 할 주체들은 새로운 의무가 부과되는 데 대해, 또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새로 시도해야 하는 것에 대해 볼멘소리를 낸다. 여기에서 감히 말하고자 한다. 누군가는 지금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고. 그리고 미국처럼 Fixing America를 구태여 외치지 않더라도 고쳐 가면서 앞으로 나아가자고.

 

박영수(한국시설안전공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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